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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Eng.

 

PARK JUNGSUN

 

     시간과 공간의 변증법적 이미지

 

박정선은 영상, 설치, 퍼포먼스, 평면 등 오늘날 시각예술의 범주 내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미술의 여러 장르를 종횡하며 자신의 작업적 지평을 확장시켜왔다. 오늘날의 미술이 탈권위, 탈장르라는 모토 하에 신체 또는 매체의 심리적․사회적 수용패턴과 인식과정을 창작적 사유의 중요한 동기로 상정함을 볼 때, 박정선의 이러한 작업적 사유는 매우 설득력 있는 접근방식이라고 여겨진다. 그의 작업은 미술에서의 공간성과 시간성, 즉 고정된 공간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시간 사이에서 예술의 모습은 어떤 것이라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자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그가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 요소로 보기보다는 양자가 상호 침투하는 가운데 작품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적 서사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적 수단으로 보여진다.


 

의식적 자동기술법

이번 개인전에서 박정선은 세계가 물질로부터 비롯되어 생물로 변화하고 하나의 예시적 이미지로 변형되는 일련의 과정을 평면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가 얼마 전까지 관심을 보였던 것은 에나멜이라는 재료가 지지대에 밀착될 경우 어떤 형식적․내용적 의미변화가 일어날 것인가의 문제였다. 우선 캔버스에 수차례 안료를 입혀 균질의 모노크롬 화면을 만든 뒤, 여기에 에나멜 물감을 밀도 있게 바른 후 캔버스를 세우면 그것이 중력에 의해 하향하면서 큰 물방울 형태가 만들어 진다. 이 형태는 캔버스의 중심부에서 하반부 까지 타고 내려가며 행위의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이 과정은 하나의 기록적 성격을 띠며 관객들에게 읽혀진다. 이는 흔히 말하는 초현실주의적인 무의식적 자동기술법(automatism), 즉 작가가 화면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철저히 방기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으로, 박정선은 ‘의식적’으로 이러한 형태를 유도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이루어낸 형태는 이성에 의한 통제 없는 관념의 공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물자체가 스스로 추동하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이의 생명성을 보장하고, 시간의 추이에 따라 진행된 생로병사의 과정 이후에 또 다른 생명성을 획득한 작품에 대한 형태론적․의미론적 결과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것은 생성, 긴장, 궤적, 정지, 지속이라는 시공간적 맥락에 의한 순환고리다. 이렇게 시간적 긴장 이후에 공간적 실존으로 구체화된 그의 작품은 빛과 조우하여 예기치 않은 미적 가치를 유발하는가 하면, 형태가 주는 미묘함으로 인하여 강한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힘의 발산과 제어

최근 박정선은 작업장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 방사형태로 물감을 뿌려(dripping) 확산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화면 중앙부의 ‘○’형태는 형식적으로 올오버 페인팅(all-over painting)과 차별성을 두기위한 작가의 전략일 수도 있으나 외계의 어떤 가치와의 연관을 시각화하기위한 최소한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언표라기보다는 화면 안에서 제약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외계와 연락하고 있는 미확정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표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다소 의외의 설명인데,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무규정한 미지성과 소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작가의 넋두리이자, 대상(물성) 스스로가 생명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한 언술로도 받아들여진다.  이때 재료, 행위, 상징 등의 개념은 그의 작품을 읽어내기 위한 중요한 요소로 대두된다. 이는 다른 말로 대치하면 물성, 시간, 기호 등으로 모더니즘 이후 작가들이 집요하게 문제 삼았던 개념들이기도 하다. 일정의 경지에 오른 화가의 드로잉처럼 활달하게 분산하는 선은 빛을 머금거나 반사하면서 잠사(蠶絲)와 면사(綿絲)의 그물망을 이루고 있다. 이때 느껴지는 힘의 파장은 캔버스의 사각틀에 의해 제어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다시 작가의 말을 빌면 이는 자연에서 볼 수 없는 형상인 것 같으나 자연의 본질적인 구조이자 자연현상이다. 말하자면 이는 현상들의 본질, 즉 동일한 현상들의 두 가지 고유성인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설명된다. 즉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그 형상은 타자화되어 외연적 형식에만 주목하게 되지만, 작가의 입장으로 접근하면 작품 내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되고 모든 감각을 통해서 작품이 살아 숨쉬는 고동을 체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아마도 움직임에 의해 여러 방향으로 쏠리고 있는 선들의 유희, 그리고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울리며 점차 그 농도를 더해가는 검은 색의 울림 같은 것일 게다. 이 진동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에게 자연계의 현상과 사물의 본질이 구체적으로 현현된다.


 

지난한 노동의 과정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자기를 자기로 정립하고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한정하는 가운데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하는 모순적 위치에 놓여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박정선의 그림에 나타나는 노동의 흔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바깥세상의 현상으로부터 영양을 섭취하여 그것들로부터 자극받아 사물의 울림을 듣고 공명하여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외롭고 처절한 시간과의 싸움과 육체적 노동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캔버스 상에 칠과 덧칠을 수회 반복하고 다시 에나멜 물감으로 드리핑하고 형상을 만들어 가는 그의 작업 과정은 엄청난 장인적 노고와 예술가적 사유를 요구한다. 그러한 사유는 고백적인 것도, 분노의 표출도 아닌 내면적 실재에 관한 어떤 의미망의 표현 같은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도시, 인간, 자연이라는 상징성을 함의한다.

실재를 관념화하고 이를 다시 구체화하는 일은 이중의 노고일 것이다. 박정선은 형태가 분명치 않고 혼돈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포착할 수 없는 형식으로 실재의 현상을 표현함으로써 도달할 수 없는 무한 영역에 스스로 자신을 던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이경모 (미술평론)